J : 야, 자소서에 군대얘기하면 무조건 떨어져.
L : 진짜? 이미 냈는데?
자기소개서에서 대답해야할 질문 항목들이라는 것들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1. 희생을 각오하고 타인이나 소속된 단체를 위해 행동한 경험을 기재하여 주십시오.
2. 가장 열정/도전적으로 임하였던 일과 그 일을 통해서 이룬 것에 대해 기재하여 주십시오.
이것 참 통탄할 노릇이야. 대한민국의 20대들을 다 모았을때 어떤 단체에 심각하게 깊게 관여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또 그중에 아주 빛나는 희생한 경험을 가진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나는 조금 특별한 군대를 나온 덕분에 군대 얘기를 쓸 수 있었다. 아니 군대 얘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가 겪은 일중엔 위 질문에 가장 부합하는 경험이었으니까. 스물 다섯남짓 한 우리에게 어쩜 그리도 바라는게 많을까?
많은 기업들의 신입채용은 "우리는 20대 중후반의 창의적인 인재를 원합니다! 그런데 경력 많이 있으면 좋겠네요!" 를 표방한다. 우스갯소리로 시작했는데, 이젠 너무 사실이라 웃을수도 없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각종 영상매체나 SNS에 나오는 그러한 청년 성공사례등을 보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거 봐, 젊으면 저렇게 다 할 수 있는거야!" 라고 한다. 심지어 강단에 선 사람조차도 그렇게 말한다. 너도 할 수 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 네가 노력이 부족한 거라고.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에 강사로 나가거나, 과외를 할 때, 어린 친구들앞에 선 나는 이런 말을 해줬다. "야, 아무나 못 하니까, 특별하니까 TV에 나오는거야", "니들은 그런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아니 그럴 확률이 매우 많지. 그러니까 부지런히 무언가 해야하는거야." 라고.
현실감 팍팍 들어간 이런 불평을 백날 해봐야 무슨 소용일까. 어쨌든 기업은 더 좋은 인재를 뽑고싶어하니까, 화려한 삶을 살지 못한 내 탓이지. 경험이 없는 내 탓이지. 자소서는 전산을 타고 이미 넘어갔고, 초조한 한달이 지났다.
"서류전형 합격, 인적성검사 공지"
벚꽃잎의 은하수가 하늘에 날리는 4월, 인적성검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 참 쓸쓸하다. 전형에는 있지도 않은 역사에세이를 준비해서 갔으니, 준비가 얼마나 안 됐는지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시험장을 나와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 길에 벚꽃잎이 가득 흩날린다. 내년엔 내 이력서가 저만큼 흩날리겠지. 영역당 네다섯 문제씩은 다 비우고 나왔는데, 한 달 뒤엔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인적성같은건 그냥 PF정도만 보고, 자소서 위주로 따지는 모양이구나. 이 회사는 학점으로 본다더니 대충 그랬는 모양이구나. 면접은 생각보다 편안한 분위기였고, 그 많은 사람들중에 나만 벌벌 떨었다. 발표는 나름 잘 했는데(그저 형식적으로만), 나같아도 나를 붙여줄 진 모르겠다. 회사에 지원한 놈이 관련 경험은 전혀 없고 전시회나 한두번 가본게 전부라니. 부끄러운 발표를 했구나.
마지막 포트폴리오 발표에선 면접관이 내 기분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는지, 당황스런 질문을 했다.
면접관1: 여자친구는 있나요?
나 : 아뇨, 아직 없는데요.
면접관1 : 회사 오면 더 없을텐데? 하하
나 :
약간 상했다. 다행히 떨린건 덜 했다. 영어면접+인성면접+포트폴리오면접, 뒤돌아 생각해보니 어느하나 크게 밉보인건 없었다. 그래서 인턴 기회를 줬나보다. 메르스의 여파로 일정이 많이 뒤로 밀렸고, 단축된 인성연수를 받았다. 모 여대에서 했던 인성캠프는 최악이었다. 매년 이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걸 장기코스로 진행하고 외부 기업에서도 제법 사람을 맡기는 모양이다. 내부 피드백을 통해 인성캠프를 계속 발전시켜 나간다고 하는데, 캠프를 진행하는 3일동안 어느 부분에서 인성을 평가하는지, 이런 방법으로 어떻게 개인의 인성을 쉽게 평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 많이 가는 커리큘럼이었다. 평가받는 입장에서는 객관성이나 전문성을 느끼기 어려웠다.
4주동안의 인턴생활이라 함은 참으로 애매모호한 것이다. 바쁜 현업에 묻힌 팀원들에겐 무엇 하나 물어보기 참 미안하다. 그래서 이것저것 물어보면 친절히 알려주는데, 학부생과 현업 종사자의 수준차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 100을 들으면 30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다. 아, 드라마 "미생"은 제법 좋은 직장을 보여주는 것이었구나! 혼자 공부할 것이 많았고, 나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연구장학생 전형이라는것이 지난 기수까지는 100%에 가까운 합격률을 보장해주었지만, 이번 기수부터는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다. 80%, 70%, 아무도 모른다. 인턴을 하면서도 불안감은 더해가고, 개인과제 준비하랴 팀프로젝트 준비하랴 총알같은 4주는 그렇게 지나갔다. 사람도 좋았고 회사도 좋았는데... 아무리 좋은 사람이 많아도, 사람이 모여서 그룹이되고, 팀이 되고 더 크게는 기업이 되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보았다. 현실은 생각보다 답답하고 복잡했다.
인턴이 끝나면 보름만에 나온다고 했던 결과발표는 질질 끌고 또 질질 끌어 한달 하고도 한 주가 넘어서야 나왔고, 나는 최종탈락했다. 모두가 예상하고있던 80%의 채용률에 훨씬 못 미치는 약 50%의 인원만이 연구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동기들이 있는 단체 메신저 방에선 위로와 축하의 말이 오간다. 우리는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없었고, 진심으로 위로받을 수 없었다.
나는 취업이 간절했지만, 그게 꼭 이 회사일 필요는 없었다. 아, 물론 국내 최고의 연봉과 복지, 근무조건을 가진 회사이긴 했다. 분하지, 암. 여길 못 가다니. 회사가 날 떨어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회사의 분야와 관련된 열정이나 경력이 보이지 않아서였을까? 원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것을 바랬던 까닭일까? 수많은 능력자들 중에 조금 덜 돋보였을 뿐일까? 협력과 소통이 중요한 그룹에서 돋보이려고 발버둥쳤던 까닭일까?
직접 듣지 않는 이상 이유를 알 수는 없겠지만, 결과는 탈락. 떨어졌다.
.그래, 좋은 경험 했다.
사실 이 말 하는 걸 정말 싫어했다. 항상 결과가 모든 걸 말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자꾸 뭘 겪고 떨어지고, 또 남이 못 하는걸 해보고 못 얻는걸 얻어보고, 이렇게저렇게 살다보면, 사람 사는게 그런게 단순한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앞으로 몇번은 더 떨어질텐데 벌써 이렇게 힘들어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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